탄소문화원

[Why] [이길성 기자의 人사이드]
靑春이여, 멘토 찾으려고 헤매지 마라… 답은 네 안에 있다

  • 이길성 기자
  • 입력 : 2014.02.22 03:02

    멘토 범람의 시대, 길을 묻다… 철학자 박이문

    '철학 인생 50년'의 솔직한 고백
    인생의 답이 뭐냐고? 나도 몰라요
    '나를 따르라' 할 자신도 없죠
    단 한 번밖에 없는 인생
    매순간 치열하게 살라고 말할 뿐…

    청춘들, 왜이리 '멘토' 갈망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큰 사회라
    누군가에 기대려는 것 아닐까…
    삶엔 크든작든 실패가 따르는 법
    용기 내 '당신의 인생'을 살아라

    "지적 탐구의 원동력? 아이같은 호기심이지, 뭐
    미녀들 탄 車 지나가면 쫓아가 꼭 얼굴 봤다니까"

    불문학에서 철학으로
    문학으로만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같은 게 있었죠
    사르트르·데리다를 보면서
    공부했다, 쓰러질 때까지…

    그는 순수한 '童子의 얼굴'
    김수환 추기경 얼굴을
    닮았다는 소리 많이 들었죠
    어머니 돌아가셨을 땐
    나이 쉰둘에 펑펑 울었다

    지적 여정, 끝나지 않았다
    샘이 날 정도로
    부러운 철학자는 칸트…
    그래도 칸트 넘어서는
    최후의 저작 남기고 싶다

    
	청춘 뒷모습

    몇 년 전 한 젊은이가 철학자 박이문(朴異汶·84)의 집으로 전화를 걸어왔다. "선생님, 사는 게 힘이 듭니더. 정말 자살하고 싶습니더." 부산에 산다는 20대 청년이었다. "도대체 산다는 게 뭡니꺼? 우리는 왜 사는 겁니꺼?"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 청년은 따지듯 물었다.

    어려운 질문을 받으면 늘 그랬듯 박이문은 백발이 된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거야 나도 모르지요." 청년의 말을 한참 들어주던 박이문이 말했다. "당신의 인생은 당신의 것입니다." 청년은 그 뒤로도 몇 번 전화를 걸어왔다. 박이문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인생, 그게 뭔지 나도 아직 모르겠습니다."

    박이문은 50년 전 프랑스에서 철학 공부를 시작해 미국과 한국에서 43년간 철학을 가르쳤다. 대가(大家)를 만든다는 '1만 시간의 법칙'을 훌쩍 뛰어넘어 4만 시간, 5만 시간을 진리의 문제에 천착해왔다. 그의 저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노장철학' '예술철학' 등은 30~40년째 절판을 모르는 스테디셀러다. '길'과 같은 그의 수필은 고교 교과서에 실렸다. 이제 할아버지가 됐을 70년대 청·장년 독자부터 헤아리면 그 아들과 손주 세대까지 3대에 걸쳐 읽히는 한국인 철학자는 그가 거의 유일하다.

    그의 책은 그러나 베스트셀러와는 거리가 멀다. 요즘 서점의 철학 코너에서 젊은이들이 몰리는 책은 따로 있다. '인생의 모든 고민을 다 상담해주겠다.' '동서양 철학에 대한 묵직한 내공으로 남녀노소 누구나 겪고 있는 인생 고민에 대해 명쾌한 돌직구 해답을 내놓는다.' 자칭타칭 만인(萬人)의 멘토라는 몇몇 스님들과 여성 강사를 제치고 '우리 시대 멘토' 대열의 선두로 치고 나온 한 40대 철학자의 저서들이다. 그의 책을 펼치면 '인생 정답풀이 있어요!'라는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몇 발짝 옆 서가 한편에 놓인 박이문의 책들은 조용하다. 타고나기를 눌변인 사람, 책 속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는 나직하고 어눌하다. "인생은 누가 지시하고 인도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나는 남에게 이래라저래라 할 자신이 없어요. 나를 따르라고 할 자신이 없어요. 그렇게 해야 나를 따르는 사람이 있을 텐데. 나는 그렇게 하지를 못합니다. 누구에게라도 자신 있게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라고 말할 수가 없습니다."

    올해로 철학 인생 50년을 맞은 노 철학자의 말은 독자를 사로잡는 유머도 재치도 없이 건조하다. 하지만 묘한 울림이 있다. 박이문의 일산 집을 찾아간 것은 그 때문이었다.

    "인생, 그게 뭔지는 나도 모르지요"

    
	박이문 선생은 “누가 지시하고 인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게 바로 인생”이라고 말했다.
    박이문 선생은 “누가 지시하고 인도하는 대로 이루어질 수 없는 게 바로 인생”이라고 말했다. / 이덕훈 기자
    박이문의 육신은 읽고 쓰는 일이 버거울 만큼 쇠잔해져 있었다. 재작년 가을 뇌경색이 살짝 왔다간 후유증 때문이었다. "내 철학 인생에서 공부를 이토록 오래 쉰 건 이번이 처음이요. 허허." 그가 정신을 모아 말했다. "하지만 철학적 사유는 멈추지 않았어요. 칸트를 넘어서겠다는, 내 인생 최후의 철학적 구상은 머릿속에서 진행 중인 것이지요." 부인 유영숙(70)씨가 말했다. "남편은 토스터 사용법조차 잊어버렸는데 철학적인 대화는 가능해요."

    육체가 박이문의 의지를 시험한 건 처음이 아니다. 미국 보스턴 시먼스대 교수이던 1982년 그의 오른쪽 눈이 '사실상 실명' 진단을 받았다. 망막이 안구 내벽에서 떨어지는 망막박리라는 병이었다. 그가 쉰둘일 때였다. 한쪽 눈만으로 불어와 영어, 한국어로 된 텍스트를 읽고 쓰기를 한 것이 지금까지 30년. 그는 돋보기를 쓴 눈에 확대경을 갖다 대야만 읽을 수 있다. "글쎄, 사르트르도 눈을 잃었었지. 시몬 보부아르가 곁에서 그를 대신해 읽고 써줬지요." 박이문은 '뭐 그럴 수도 있지'라는 투로 말했다.

    ―'인생의 의미'를 평생 사유하셨는데요.

    "내가 아직도 그걸 탐구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해요. 하지만 분명한 답을 아직 갖고 있지 못합니다. 솔직히 말하면 인생의 궁극적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생의 의미가 뭐냐'고 따지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지요. 우주는 왜 존재하느냐는 물음과 비슷하지요. 하지만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제 나름의 답은 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우리는 누구나 한 번밖에 못 삽니다. 남들의 삶을 반복해서 살아서는 안 됩니다. 그건 자신의 삶이 아니죠. 인생이란 결국 살아 있는 동안 내가 하는 구체적인 행동의 총합입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어떤 사람이 될 것인지 누구도 말할 수 없습니다. 죽는 순간까지 철저하고 치열하게 하루하루를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멘토라는 분들은 더 구체적인 조언들을 하는데요.

    "그분들 모두 자기대로 이야기가 있겠지요. 하지만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어떤 근거에서 이렇게 살라 저렇게 살라고 할 수 있는지….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할 수는 있겠지요. 나는 누구에게나 들어맞는 보편적인 해법을 줄 자신이 없어요. 삶의 의미는 결국 각자가 살아가면서 깨칠 수밖에 없는 거지요."

    
	1965년 미국 남가주대학으로 떠나기 전 파리를 거니는 서른다섯 시절 박이문.
    1965년 미국 남가주대학으로 떠나기 전 파리를 거니는 서른다섯 시절 박이문. / 박이문 선생 제공
    ―젊은이들이 왜 이렇게 멘토를 갈망하는 걸까요.

    "프랑스 젊은이들은 건방지게 보일 정도로 당당해요. 잘난 척하는 것 같지만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주장을 해요. 그에 비해 우리 젊은이들은 자신만의 생각으로 어떤 길을 가는 것을 두려워하는 게 아닌가 해요. 실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누군가에게 의지를 하려고 하는 게 아닐까요.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삶에는 크든 작든 실패가 따를 수밖에 없어요. 주체적으로 살려면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박이문은 말했다. "답은 외부가 아니라 내 안에 있어요. 우리 젊은이들은 내 청년 시절보다 훨씬 뛰어난 능력과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요. 다른 사람의 조언을 거부할 이유는 없지만 그건 어디까지 참고로만 생각했으면 해요."

    ―인생 살아가는 것을 소설 쓰기에 비유하셨죠.

    "우리 각자는 오직 나만이 내가 죽는 날 끝을 내야 하는 소설의 책임자입니다. 어떤 이야기를 써서 어떻게 끝을 맺을까 하는 문제는 각자 자신의 결단에 따라 어떤 주제를 선택해서 실천에 옮기느냐에 달려 있는 거지요. 내 인생의 창작자로서 각자 '나'를 긴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창작자로서 자부심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박이문은 과거 한 인터뷰에서 "내 20대의 삶에서 오늘의 20대가 교훈으로 삼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내 이야기가 어떤 의미가 있다면 반면교사로서일 뿐"이라고 했다. 그는 "60년 가까이 '어떻게 살 것인가'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답을 구했지만 팔순이 된 지금까지도 확실한 답을 찾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멘토가 되고 싶지 않으세요.

    "저는 타고나기를 누군가를 이끌 수 없는 사람이에요. 말주변도 없고. 저와 의견이 다른 사람이라도 그의 말을 경청해줄 수는 있겠지요."

    ―청년 박이문에겐 멘토가 없었습니까.

    "글쎄요. 나는 모든 철학자를 읽고 배웠지만 누구를 추종하지는 않았어요. 그들을 넘어서는 것이 내 목표였지요.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멘토가 어떤 것인지 모르겠으나 나를 철학의 길로 이끌었다는 점에선 사르트르가 멘토일 수 있겠지요."

    1953년 봄 어느 날. 서울대 불문과 학생이었던 박이문은 일본어 책 한 권을 집어들었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에 담긴 실존주의를 해설한 책이었다. 그는 6·25 피란길에서 살아남았고, 부산의 전시 육군훈련소에서 훈련을 받다가 영양실조로 쓰러져 의병제대를 했다. 식민지와 전쟁이라는 어쩔 수 없는 부조리에 분노를 느껴왔던 박이문은 생의 부조리를 철학적으로 풀어내는 사르트르의 논리에 소름이 끼쳤다. 지금의 박이문을 만든 지적 여정은 이미 그때 시작된 것이다.

    불문학에서 철학으로

    어린 시절 박이문의 집에 사주 보는 이가 왔다. 박이문의 손금을 본 그는 "커서 군수가 될 재목"이라고 말했다. 부친은 좋아했지만, 박이문은 속이 상했다. 박이문은 "일본 유학을 했던 큰형이 가져온 일본 책들을 통해 서구, 특히 프랑스의 문학과 철학을 접했던 나는 그때 이미 지적으로 더 월등한 뭔가를 이루고 싶다는 꿈을 꿨다"고 말했다.

    서울대 불문과를 나와 이화여대 교수를 하던 1961년. 박이문은 교수직을 던졌다. 번역해서 번 돈으로 마련한 방 두 칸짜리 단독주택도 팔았다. 자신이 모시던 노모는 형님댁에 모셨다. 어머니의 눈물을 뒤로하고 김포공항을 떠나 홍콩에 도착했다. 박이문은 그곳에서 프랑스 여객선 캄보쥬(Combodge)호에 올랐다. 프랑스 마르세유까지 가는 한 달간의 뱃길을 그는 '지적 출가'라고 말했다. 박이문의 이후 여정은 서구 철학자들에 대한 지적 열등감을 극복하고 자신만의 철학을 일구는 과정이었다.

    ―불문학 박사 논문은 도쿄대 총장을 매혹시켰다고 하던데요.

    1966년 어느 날 일본 청년 하스미 시게히코는 파리의 한 서점에서 한 문학 논문을 발견했다. 논문은 난해하기로 악명 높은 말라르메의 시 세계를 철학적으로 분석하고 있었다. 하스미는 저자가 한국인이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동양인도 이런 논문을 쓸 수 있구나!' 바로 박이문의 소르본대 박사학위 논문이었다.

    "하스미는 훗날 일본 지성의 최고봉이라는 도쿄대 총장이 됐지요. 1991년 그와 처음 만났어요.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던 그가 학술행사차 포항공대에 왔을 때 내게 연락을 했어요."

    ―그렇게 잘했던 불문학을 왜 접었습니까.

    "문학으로 채워지지 않는 욕구가 자꾸 커졌어요. 파리에서 사르트르, 데리다, 들뢰즈 같은 석학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그들과 대화라도 할 수 있는 수준에 올라가고 싶었어요. 단 한 번만이라도 그들이 경험하고 있을 지적 환희를 스스로 체험하고 싶었던 거지요."

    불문학 박사학위를 제쳐두고 철학학사 과정을 다시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리 노력해도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궁핍한 생활 가운데 엄습한 지적인 좌절감은 육신을 갉아먹었다. 비척비척 말라가던 그는 기숙사에서 쓰러졌다. 의사는 "오른쪽 폐가 거의 사라졌다"고 말했다.

    ―무슨 병이었습니까.

    "폐기흉이었어요. 상태가 심해서 죽음까지 생각했어요. 회복하는데 몇 년이 걸렸어요."

    ―지적 열등감은 언제 사라졌습니까.

    "프랑스 철학자 데리다의 도움으로 미국 남가주대(USC)에서 장학금을 받고 철학 박사 학위를 했어요. 그 뒤 미국 시먼스 대학에서 교수를 했는데 그때 열등감을 완전히 극복했어요. 처음엔 강의실에 들어가려면 무릎이 후들거렸어요. 서툰 영어로,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철학을 가르쳐야 했으니까요. 문제는 영어가 아니었지요. 가르치면서 내가 얼마나 무식한지, 내 교양이 얼마나 박약한지 알게 됐어요." 그가 택한 건 무모할 정도의 정공법이었다.

    ―어떻게 하셨어요.

    "새 학기마다 일부러 새로운 과목을 개설해 가르쳤지요. 1년에 다섯 과목씩 가르쳤어요. 스스로 공부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나 자신을 몰아간 것이지요. 노장사상과 같은 동양철학, 힌두교와 종교철학, 과학철학 등 철학의 모든 분야를 강의했지요. 그때의 공부를 바탕으로 지금 스테디셀러가 된 책들을 썼어요. 그 시기를 지나니 세계적인 석학 누구를 만나도 주눅이 들지 않았어요."

    박이문은 사회학자 정수복과 대담에서 "미국 대학에서 가르치면서 지적 성숙이 이뤄졌다"고 말했다.

    생활의 모든 것을 최소화했다. 1982년 박이문과 결혼한 유영숙씨는 처음 보스턴 박이문의 집을 찾았을 때 풍경을 잊을 수가 없다. "대학교수라는 사람도 정말 꼭 필요한 것만 갖고 살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어요. '기역(ㄱ)'자 책장, 주방엔 접시 몇 개, 거실엔 한귀퉁이가 망가진 흑백TV가 전부였죠. 식료품 가게에 가면 정말 카트를 밀고 100m 달리기 하듯 필요한 걸 담았어요. 뭔가를 고를라치면 박 선생이 '고르긴 뭘 골라' 하며 재촉했거든요."

    
	박이문은 “나는 모든 철학자들로부터 지혜를 배웠지만 누구를 추종하지는 않았다”며 “젊은 시절 나보다 훌륭한 지금의 젊은이들은 ‘내 안에 답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 있게 살아가라”고 말했다.
    박이문은 “나는 모든 철학자들로부터 지혜를 배웠지만 누구를 추종하지는 않았다”며 “젊은 시절 나보다 훌륭한 지금의 젊은이들은 ‘내 안에 답이 있다’는 생각으로 자신 있게 살아가라”고 말했다. / 이덕훈 기자
    어린아이 같은 호기심

    박이문은 칠순에 포항공대 강단을 떠나, 팔순까지 다시 연세대에서 철학 강의를 했다. 부인 유영숙씨는 "그 뒤로도 남편은 매일 초인적으로 읽고 썼다"고 말했다. "한번 책을 잡고 앉으면 3~4시간 미동도 않아요. 엉덩이에 욕창이 생길까 걱정이 될 정도였지요." 뇌경색으로 읽고 쓰기를 중단하기 전에도 박이문은 칸트를 읽고 있었다.

    ―평생을 읽었던 그 난해한 책들, 물리지 않습니까.

    "볼 때마다 새로워요. 감탄이 나옵니다." 그게 어떻게 가능한 것일까.

    유영숙씨는 '동심, 아기 같은 호기심'을 꼽았다. "남편은 그냥 아기예요. 알고 싶고, 인정받고 싶어 하는 마음이 영락없는 아기예요. 아기들은 제 호기심부터 풀어야 하잖아요. 남편도 꼭 그래요.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저런 마음으로 늙을 수 있느냐'고 놀라요."

    시먼스 대학 교수 시절 박이문 교수 내외는 1500cc짜리 소형차를 타고 다녔다. "차를 몰다가 금발 아가씨들이 탄 오픈카가 지나치면 선생은 가던 길을 접고 그 차를 쫓아가요. '얼굴을 봐야지'라는 거예요. 호기심이 동하면 반드시 풀어야 해요. 학문을 할 때도 똑같아요."

    포항공대 재학시절 박이문의 강의를 들었던 박상렬(44·회사원)씨도 석학의 순수한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한번은 교수님이 돌아가신 모친 이야기를 했어요. '내가 장가라도 안 들었으면 정말 천애고아가 될 뻔했다'고 하셨어요. 농담이 아니라 너무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모습이 마치 소년처럼 보였어요." 박이문의 모친은 1982년 별세했다. 유영숙씨와 결혼하기 몇 달 전이었다. 유씨는 "쉰둘이나 된 양반이 얼마나 슬피 울었는지 조카가 '삼촌이 눈물, 콧물 다 흘리고 울었는데 남자가 그렇게 서럽게 우는 건 처음 봤다'고 전해줄 정도였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정과리는 박이문에 대해 '동자(童子)의 얼굴을 하고 있다'고 평했다. 나이가 들면서 그는 '김수환 추기경을 닮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고 한다. 스웨덴에 갔을 때는 한 청년이 "노벨문학상을 탄 오에겐자부로 선생 아니냐"며 반가워해 난감한 적도 있었다.

    동심은 배움에 체면을 따지지 않는 겸손함과 맞닿아 있다. 시먼스 대학에서 교수를 할 때 하버드나 다른 교수의 강의를 청강했다.

    ―교수로서 체면이 신경쓰이지 않던가요.

    "아이고 체면이 어딨어요. 하버드 대학에 얼마나 들을 만한 코스가 많은데."

    ―철학자로서 샘이 날 정도로 부러운 이는 누구입니까.

    "칸트죠. 철학의 개념을 다 정리했잖아요. 나는 그가 철학계의 아인슈타인이라고 생각해요."

    ―칸트를 넘어서는 게 선생의 목표입니까?

    "그렇죠. 칸트를 넘어서는 것이죠."

    ―선생의 독자적인 사상이라고 할 '둥지의 철학'을 팔순에서야 저서로 펴냈습니다. 좀 더 일찍 펴냈다면 하는 회한 같은 것은 없습니까.

    "아침에 도(道)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고 했지요. 내가 진리를 깨칠 수만 있다면 그게 언제든 상관없지요. 최후의 저작, 그것은 아마도 영어로 쓸 것입니다만, 그것을 쓸 기회는 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생을 살게 된다고 해도 철학을 하시겠습니까.

    "인생은 단 한 번뿐입니다. 이번 생으로 끝나는 것이죠.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다시 생을 산다는 가정은 무의미합니다."

    박이문(朴異汶)은 필명이라는데…

    철학자이자 시인으로 1930년 충남 아산에서 났다. 서울대 불문학과와 대학원을 나와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서 불문학 박사(1964년)를 했고, 미국 남캘리포니아대학에서 철학박사(1970년)를 했다. 미국 시먼스 칼리지(~1991년), 포항공대(~2000년), 연세대(~2010년)에서 강의를 했다. 철학과 문학 분야에서 100권이 넘는 저서를 펴냈다.

    본명은 인희(仁熙)로 이문은 필명이다. 그가 한 대담에서 밝힌 작명 사연. “본명 인희는 여자 이름 같아 싫었고 뛰어난 글쟁이가 되겠다는 생각에 문(文)자를 넣은 필명을 짓고 싶었다. 독창적이라는 의미에서 이(異)자를 쓰기로 했는데 한 지인이 이문(異文)은 너무 노골적이니 ‘문’자에 삼수변을 붙여 조금 완화하자고 했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상생·공존을 추구하는 생태학적 세계관을 제시하는 등 현대 과학과 기술에 대한 철학적 인식을 개선한 공로로 대한화학회가 2012년 처음 제정한 ‘탄소문화상’ 대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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